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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기록

이터널 선샤인

[기억이 깨뜨릴 수 없는 것, 사랑]

 

지나간 것은 잊어버리라고 하지만 언제나 쉽지 않다.
그중에서도 가장 잊어버리기 어려운 것이 '사랑'의 감정이 아닐까 싶다.
누군가는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진다'라고 한다. 내 생각에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 같다. 
이미 누군가와 관계를 맺은 순간, 물들기 시작한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그 관계가 흐믈해져도 이미 나는 그 관계에 의해 변질되어 있다. 

 

따라서 다른 사랑을 받아들일수 있지만 이전 사랑을 통해 연속적으로 내가 존재하니 완전히 잊히는 것은 어렵다.

영화는 조엘(짐캐리) 과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의 뜨거운 사랑을 보여줌과 동시에 차가운 이별도 보여준다. 차가운 이별은 서로에 대한 기억을 삭제하는 선택을 부르고, 기억이 없는 상대를 다시 만나 이전의 아픈 추억을 반복할지 아니면 새로운 사랑을 만들어 갈지 선택의 기로에서 영화를 끝낸다. (사실 어느 정도 길을 선택한 것처럼 보인다.)

1. 미셸 공드리의 마법

일단 공드리를 만난 것부터 마법같다고 느낄 때가 있다. 아마 많이들 이야기하는 '그 감독, 그 배우, 그 작가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행복함'이라고 극찬을 하곤 하는데 정확히 그 느낌이다. 

'호불호가 있는 감독'이라는 타이틀은 바꿔말하면 누군가에게는 축복이라는 것이다. 아니,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여러 가지 영화를 쭉 나열하고 공드리의 영화를 찾아보라고 하면 바로 찾을 수 있을 만큼 스타일이 독특하다. (공드리의 영화를 한편이라도 봤다면 누구나 찾을 수 있다.) 그가 자주 쓰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활용, 색감은 놀라울 정도로 극대화를 잘 시킨다. (놀라울 정도로 많이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단순히 일반적인 연출이 아니고 독특하다고 해서 그를 좋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효과를 쓰는 절제력은 떨어질지 몰라도 영화의 톤을 벗어나서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리지는 않는다. 언제나 각각의 영화에서 맡은바를 충실하게 해내며, 조금 과장하면 오히려 영화를 이해하는 것에 큰 공을 세운다.

이 영화에서는 어쩌면 그간 써왔던 무궁무진한 효과들을 조금 줄이고 미장셴과 색감에 집중했다.
가장 쉬운 예로는 복잡하게 시간이 얽혀있는 구성을 관객들로 하여금 이해를 돕겠다는 배려로 클레멘타인의 머리 색을 통해 조엘과의 사랑의 온도를 표시한 것, 인물이 공간은 이동할 때 굳이 쭉 여정을 풀지 않고 바로 생략해서 공간을 넘겨버린다. 그리고 인물 내면의 감정을 조명의 각도나 비춤의 정도로 드러내는 것이 있다. 

배우가 직접 대사나 표정을 통해 설명하지 않아도 그가 어떤 느낌을 지금 받고 있는지 우리는 충분히 예상 가능하게 공간을 활용한다. 또한, 공간을 생략함으로써 몰입이 깨지는 빈틈을 매우고 빛이 없는 곳에서는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준다. 그렇게 공드리는 관객이 인물들에게 한층 더 가까운 곳에서 바라볼 수 있게 오히려 도와준다.


2. 쓸쓸함

'기억을 삭제한다'는 굉장히 자극적이고 노골적인 설정은 정확히 폐부를 찌르는 듯한 느낌이 있다. 영화를 다보고 다시 오프닝을 떠올릴 때 그 씁쓸함은 한마디로 이야기하기 어려울 정도다. 클레멘타인에 대한 기억을 다 날려버려서 누구나 알 거라고 생각하는 '클레멘타인'노래 마저 기억이 없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서로에게 끌리는 것조차 슬프다.
뇌를 건드려서 기억을 지워버리면 아픈 사랑도 잊어버린채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수 있을 거란 희망은 더더욱 슬프게 다가온다. 온전히 뇌만 가지고 있다면 정말 편리할 수 도 있지만 인간은 그렇게 간단하게 설계되어 있지 않은 듯하다. 
온몸이 그 사람을 기억하고 있어서 운명처럼 끌리는 걸로 보인다. 글의 서두에 이야기했던 이미 변질되고 있는 것이다.
최신 기억부터 차차 지워나가는 조엘은 클레멘타인과의 절절하게 사랑했던 초반의 기억으로 넘어감으로써 이 삭제를 멈춰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사실 이 장면이 너무 슬펐다. 처음부터 안 좋은 커플은 세상에 없지만 모두가 망각하고 시간이 지나가면 그때의 소중함은 개나 줘 버리고 서로를 이겨먹기 위해 자존심 겨루기를 한다. 그리고 다음 사랑에는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하면서 똑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아마 삭제하러 온 라쿠나의 직원의 니체의 인용에는 이 부분도 포함되어 있지 않나 싶다. 망각은 인간을 편리하게도 하지만 영원히 괴롭히는 족쇄이기도 하다. 

일생동안 후회와 다짐을 반복하며 그렇게 소멸해버리는 생물. 
  

3. 그럼에도 사람

공드리가 영화의 결말에서 툭 던지듯이 그래도 'Okay' 이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고 지금 당신이 너무 좋다.
니체의 영겁회귀 '모든 것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클레멘타인의 말을 빌려오면 이렇게 설레고 좋아서 사랑을 시작해봤자 어차피 기억을 삭제하기 이전처럼 우리는 다시 불나게 싸우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며 결국은 또 헤어질지도 모른다가 아니라 '모든 것이 영원히 반복되고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나니 가보자'라는 무한 긍정의 의미가 담겨있는 것 같다. 그리고 다시 우리는 사람을 선택한다. 공드리의 <무드 인디고>에서도 결국 사람은 사람과 있을 때 가장 사람답다는 메시지를 영화에 담고 있다. 그리고 어차피 반드시 후회한다면 덜 후회하는 쪽으로 매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고 후회하자는 내용도.


리뷰를 맺으며, 아일랜드의 작가 오스카와일드가 말했다. 사랑에는 두 가지 비극이 있다고.
첫 번째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때 그리고 두 번째는 그 사람과 사랑에 빠졌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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