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대한 담론을 응축시켜 달콤한 케이크에 녹였다.]
단 하나의 작품으로 추앙받는 감독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작품으로 추락하는 경우를 많이 목격했다.
경우는 다양하지만 대체적으로 이렇다.
1) '이게 잘먹히는구나' 싶어서 혹은'그곳'에 갇혀버려서 영원히 그 한 작품에 매몰되어 버리는 경우.
2) 자신의 진짜 무기가 무엇인지 망각한 채 '뭐든지 잘하는 감독이라는 것을 보여 주겠어!'라는 욕망을 쫓아 결국 나락으로 가버리는 경우.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그에 반하는 경우는 다음과 같다.
히트작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의 강점이 무엇인지 알고 끊임없이 뻗어가는 감독
나는 이 타이틀이 가장 잘 어울리는 감독 중에 한 명으로 ‘미셸 공드리’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가장 좋아하는 멜로 영화이자 내 방에 유일하게 액자로서 자리 잡고 있는 ‘이터널 선샤인’은 미셸 공드리의 대표작이다. 배우의 연기, 내러티브, 플롯, 미장센들이 서로 자기들이 잘났다고 주장하는데 정신 없다. (모두 뛰어나서.)
그리고 이 영화는 어떻게 보면 대중성에서 한걸음 뒤로 물러나고 자신의 영화적 역량을 극대화시킨 것 같다. (영화적 역량에 대중성을 포함시킨다면 할 말이 없다만.)
1. 스파게티와 피자
툭툭 끊기지만 소스와 버무려져서 굉장한 풍미를 불러일으키는 스파게티와 같은 ‘스톱모션’ 기법의 활용은 거의 영화쪽에서는 미셸 공드리를 위해 탄생한 기법 같다는 느낌을 준다. 초현실적이고 환상적인 느낌을 자유자재로 가지고 노는 미셸 공드리에게 스톱모션은 그 자체로 증폭 제이다.케이크의 데코가 기계의 부품으로 변한다거나 케이크를 잘랐더니 핫소스 통이 통째로 들어가 있는 장면, 초인종이 울리면 로봇처럼 온 집안을 돌아다니는 등등 상상의 기반을 둔 세상을 덜 괴기스럽고 가끔은 사랑스럽다는 느낌까지 준다. 처음 접하면 ‘저게 뭐야’라는 생각을 일으키지만 계속해서 보고 있으면 어느새 미셸 공드리가 만들어놓은 세상에 적응하고 그것을 감성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평평한 도우에 화려한 토핑은 요리사의 재주껏 제한이 없고, 여러가지 재료들이 섞여 아름다운 색감을 뽐낸다. 미셸 공드리가 쓰는 색감은 원색, 파스텔, 모노톤에 특정 지을 수 없을 정도로 모든 색깔에 만능이다. 집을 표현하면 살아보고 싶게, 음식을 표현하면 먹어보고 싶게, 심지어 거리를 표현하면 걸어보고 싶게 표현한다.
이 엄청난 재능은 단순히 그가 CF 감독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색에 대한 이해가 굉장히 높고 색을 색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감정을 넣는 것에 주목해야 할 것 같다. 특히 이영화는 색감과 감정이 적절하게 연결되어 있고, 영화를 보는 관점으로 작용한다.
그렇게 미셸 공드리는 색을 입히는 과정에서 본인의 개성이 가장 두드러진다.
2. 노골적인 은유
영화는 크게 한가지 이야기 (콜랭과 클로에의 사랑)을 쭉 그리지만, 신경이 엄청 쓰일 정도로 장 폴 사르트르를 병렬화 시킨다. 실존인물 사르트르를 등장시킴으로써 영화는 굉장히 뚜렷하게 시대상과 정서를 드러낸다.
‘실존이 본질을 앞선다’라는 주장을 기본으로 파생된 실존주의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장 폴 사르트르이다.
이전까지 많은 철학자들과 지식인들은 본질 주의에 대한 강한 긍정을 가지고 있었다.
보통 사물들은 반드시 본질을 가지고 있다. 영화에서도 나왔지만 가장 유명한 예는 ‘의자’이다.
ex) 의자는 ‘앉기’위해 존재한다. ‘앉기’가 불가능한 의자는 더 이상 의자로서의 본질을 잃었기 때문에 의자라고 할 수 없다.
그렇게 사람들은 모든 물체와 생물에 본질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정의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에 대한 본질을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의 본질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인간만이 유일하게 본질의 앞선 형태라고 생각하여 실존주의가 탄생하였다. 지극히 인본주의적인 사상이다. 어쨌든 사르트르는 당대의 슈퍼스타로 모든 사람들의 열열한 지지를 얻는다. 영화 중에 콜랭의 친구 시크도 사르트르에 미쳐버려 콜랭의 돈을 탐하기도 한다. 심지어 종교인조차 사르트르의 강연을 듣기 위해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온다. 그리고 영화는 이것을 재치 있게 비꼬아버린다. 가장 도드라지는 장면은 콜랭이 가진 돈을 모두 써버리고 일을 하기 위해 면접을 보러 가는 장면이다. 그곳에서 사장과 면접을 보기 위해 마주앉으려고 의자에 앉는데 의자가 누워버린다. (미셸 공드리만이 가능한 구조) 계속해서 앉으려고만 하면 누워버린다.
그렇다면 이것은 의자가 아닌가? 하지만 분명 앉을 수 있는 형태로 존재한다. 즉, 인간이 아닌 사물이 실존으로서 본질을 앞서 버리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런 아이러니함이 영화의 곳곳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영화를 통틀어 가장 재밌는 대치는 상상력에 있다. 실존주의에서 인간을 규정할 때 어디까지 구획할 것인가를 논하는 문제에 있어서 실존주의자들은 상상을 할 수 있는 생물로 본다.
그러나 영화가 첫 시퀀스에 ‘이것은 오로지 내 머릿속 상상에서 나온 것이기에 사실이다.’라는 문장으로 실존주의를 비꼬는 것이 흥미로웠다.
3. 교감
그렇다면 무엇인가? 본질주의도 아니고 실존주의도 아니라면? 영화가 뚜렷하게 어떤 주장을 하고 있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공감보다는 교감에 있다. 사실 실존주의의 한계라고 많이 이야기되는 것 중 하나가 인간을 굉장히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형태로 그리는 것에 있다. 본래의 역할은 없고 오로지 매 순간의 선택이 중요하다고.선택은 자유라는 주장을 펼치지만 이것은 또 다른 위험함을 낳는다. 선택하는 인간들이 무한정 늘어날 때 이런 선택에 대한 가치판단은 어떻게 할 것이며 방향은 어떻게 잡아야 하는가에 문제이다. 모든 인간들이 올바르고 정의로운 선택을 한다는 가정 자체가 이미 어떤 틀에 묶어두는 것. 즉, 자기모순에 빠진다.
따라서 사회에서 교감은 일정의 패턴을 만들고 그것이 방어기제가 된다. 서로의 실존들이 충돌하면서 새로운 것들 만들기도하고 없애기도 한다. 감정의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이며 어떤 것도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공감은 그다음 문제이다.
리뷰를 맺으며, 결국 죽는 클로에를 보며 울부짓는 콜랭의 모습으로 영화가 끝난다.
확실한 것은 순간 순간 최선을 다하라는 것과 사랑하는 사람을 놓치지 말라는 것이다.